겐슬러, 블록체인 전도사에서 ‘공공의 적’으로 퇴장하다
2024년 11월 15일, 폭스비즈니스의 한 기자가 X(옛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대선이 끝난 지 열흘 만에, “게리 겐슬러가 일각의 관측과 달리 자진사퇴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겐슬러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으로, 새 행정부와 무관하게 2026년까지 임기를 채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엿새 뒤, 겐슬러는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날인 1월 20일에 맞춰 스스로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은 암호화폐 시장에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비트코인은 연일 급등했고 시장은 ‘겐슬러 퇴장’을 대대적인 축제처럼 받아들였다.
리플랩스의 CEO는 “올해 추수감사절에 감사할 일이 생겼다”고 기쁨을 드러냈고, 업계 전문지 코인데스크는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설까지 냈다. 겐슬러는 암호화폐 업계에 ‘악마’ 같은 인상을 남긴 채 무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규제의 아이콘이 된 겐슬러
겐슬러의 SEC 재임 기간은 암호화폐 업계와의 전쟁과도 같았다. 겐슬러는 코인 산업을 “사기와 협잡이 판치는 서부 시대의 무법천지”라고 비판하며 엄격한 규제 드라이브를 걸었다. 실제로 그는 SEC를 통해 약 2700건의 집행조치를 내렸고, 21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벌금을 부과하며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업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여러 소송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편으로는 불법 거래를 단속해야 하는 명분이 있었지만, SEC의 접근법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기간 내내 암호화폐 산업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겐슬러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취임 첫날 겐슬러를 해고하겠다”는 으름장은 결국 현실이 되었고, 그의 사퇴 선언 직후 시장은 폭등하며 새로운 기대감에 부풀었다.
블록체인 전도사였던 과거의 겐슬러
아이러니하게도, 겐슬러는 한때 블록체인과 디지털 화폐의 잠재력을 역설했던 인물이었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 교수 시절, 그는 ‘블록체인과 돈’이라는 강의를 개설하며 블록체인 기술이 금융산업의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강의에서 블록체인이 기존 금융 시스템의 약점을 보완하며, 결제 수수료와 최종 결제 시간을 줄이는 혁신적 도구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기존 금융 시스템에 대한 대규모 투자의 한계 때문에 새로운 기술에 취약한 금융 기업 대신 핀테크 기업들이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처럼 겐슬러는 기술에 대한 이해도 높았고, 금융과 블록체인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전문가였다. 이런 과거 때문에 그가 SEC 위원장으로 임명될 당시에는 “규제할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는 워싱턴의 보기 드문 인물”이라는 찬사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규제 정책은 점점 더 엄격해졌고, 이 과정에서 ‘블록체인 전도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업계의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SEC의 내부 사정과 겐슬러의 고립
겐슬러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은 SEC 내부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최근 SEC는 높은 이직률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이는 겐슬러의 강도 높은 규제 정책에 따른 격무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 배경에는 2022년 테라-루나 사태와 FTX 파산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 이 두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SEC는 이를 철저히 조사하며 더 많은 예산과 인력을 요구했다. 하지만 의회는 이를 묵살했고, SEC는 부족한 인력과 늘어난 업무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겐슬러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SEC는 한 달에 하루만 일한다”는 비아냥을 날렸다. 과거 머스크는 트위터 공시 문제로 SEC 조사를 받은 경험이 있어, 겐슬러에 대한 비판에 앞장섰다.
겐슬러의 퇴장과 그 이후
겐슬러의 사퇴로 암호화폐 시장은 잠시나마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의 퇴장이 정말로 산업에 ‘낭보’일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규제 당국이 손을 놓는다면 산업의 무법화로 이어질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겐슬러는 비록 강한 반감을 샀지만, 그가 강조했던 금융 안정성과 투자자 보호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규제와 혁신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새로운 리더십의 과제가 될 것이다.
블록체인과 코인의 미래는 규제가 아닌 혁신을 통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파괴적 혁신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업계 스스로도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겐슬러는 떠났지만,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산업 곳곳에 남아있다. 이제 시장은 새로운 리더와 새로운 규제 환경 속에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그 답은 앞으로의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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