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이슈

한강 흰 내용 줄거리 요약 독후감 후기 관람평 나무위키 정보

핫이슈냥 2024. 10. 11. 10:11
반응형

한강의 소설 『흰』을 읽으며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는 언제나 ‘죽음’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잃었을 때의 기억과 겹쳐진다. 그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눈이 내리고 입김이 흰 안개처럼 뿜어져 나오는 날이었다. 열한 살이었던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의 기억은 온통 하얀 이미지로 덮여 있다. 눈 덮인 거리를 걸어갔던 어렴풋한 기억, 엄마의 흰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던 모습,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나지막이 울려 퍼지던 고모들의 흐느낌, "아이고, 아이고"하는 울음소리가 내 기억의 조각 속에서 마치 끊어진 필름처럼 남아 있다.

그때의 나는 죽음에 대한 실체를 알지 못했다. 단지 ‘흰색’이란 이미지와 죽음이 처음으로 나의 의식 속에 함께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그 기억이 오래 지나고 나서도 잊히지 않는 것은, 하얀 색이 순수함과 평온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무(無)로 돌아가는 것, 곧 끝이자 시작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강의 『흰』은 그 오래전 묻어두었던 죽음의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내게 만들었다.

이 책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강에게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산통을 느껴 아이를 낳았고, 아이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는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두 시간을 머물렀을 뿐이다. 한강의 어머니는 그 아기를 흰 배내옷에 싸서 떠나보냈고, 그것은 곧 언니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옷이 되었다. 이 짧은 생애는 작가의 삶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죽음과 흰색이 결부된 그녀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한강은 『흰』을 통해 '흰 것'에 대해 기록하고, 그 흰색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흰 배내옷, 흰 수의, 흰 눈, 흰 안개, 흰 진눈깨비, 그리고 흰 재. 작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무르던 어느 날, 그녀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를 바라보며 흰 재가 가득 쌓인 모습을 보았다. 그때 떠오른 것은 그녀가 본 흰색의 모든 것들이었고, 그것은 곧 죽음과 연관된 이미지들이었다. 잿더미가 된 바르샤바는 무참히 파괴되었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은 끈질기게 다시 일어섰다. 한강은 이 파괴된 도시에서 자신과 겹쳐지는 언니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흰색'이라는 색은 단순히 밝고 깨끗한 이미지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텅 빈 무(無)’에 가깝다.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는 공허함을 상징한다. 한강은 이 공허함 속에서 삶과 죽음을 연결시키고, 그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을 통해 언니의 존재를 다시금 상상한다. ‘언니’는 죽은 존재로서 소설 속에 있지만, 그녀는 다시금 ‘나’를 통해 삶을 경험하고 체험한다. 화자인 ‘나’는 죽은 언니를 기억하고, 언니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녀에게 삶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 ‘언니’는 마치 유령 같은 존재다. 실존하지 않지만, ‘나’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 숨쉬는 존재. 한강은 자신이 보지 못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며 그녀에게 흰 것들을 건넨다. 그것은 아마도 죽음의 끝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흰 것은 때때로 더럽혀지기도 하고, 금이 가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흰색은 여전히 순수함과 가능성을 상징한다. 죽음이 닥쳐와도 삶은 계속되고, 그 끝에서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마치 시처럼 읽힌다. 한강의 문장은 간결하고 고요하게, 그러나 때로는 깊은 감정의 울림을 남긴다. 각각의 단어들이 하나하나 세심하게 선택된 듯하며, 문장은 마치 시처럼 리듬감 있게 이어진다. 『흰』은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시처럼 느껴진다. 한강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섬세하게, 마치 작가가 그 감정을 오롯이 체험한 것처럼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감정에 설득당하고, 그것을 마치 자신의 경험인 양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상상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중요성이다. 한강은 언니의 죽음을 직접 겪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죽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독자는 그 감정에 공감하며,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한강의 문장은 우리가 겪지 않은 죽음과 삶을 눈앞에 펼쳐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장을 통해 흰 눈밭을 걷고, 흰 배내옷을 손끝으로 느끼고, 그 속에 담긴 슬픔과 고통을 함께 경험한다.

 

『흰』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 그 경계에서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흰 것들을 통해 다시금 삶을 생각하고, 그 속에서 죽음을 받아들인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죽음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삶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언젠가 내 할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나의 삶 속에 깊이 남아 있으며, 그 흰색의 기억은 죽음과 함께 나를 감싼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흰색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흰 것은 단순히 죽음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다. 한강의 『흰』은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다시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반응형